작년에 극장에서 오펜하이머를 보면서 엄청 강한 인상을 느낀 기억이 있었는데요.
크게 두 가지 였어요. 하나는 오펜하이머의 머리 속에 발현하는 순수 과학이 보여주는 광란의 춤의 영상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의 집요함과 어찌보면 애국심처럼 보이기도 하는 경쟁심이었는데요.
물리의 물자도 모르고 과학에 전혀 문외한인 관객으로써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있기도했지만 전체적으로 가슴이 답답한 느낌의 영화였는데요.
그가 한 일에 대한 역사적 결과가 성과(?) 이전에 그가 그렇게까지 하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마치 미국에 확실한 자신들의 역량을 보여주려고 엄청 애를 쓰는 것처럼 보였는데 무슨 세일즈맨도 아니고 진짜 그랬을까 싶기도 했거든요) 그럼에도 그 사람들이 추구한 진실과 정의는 분명히 있었을텐데 그 부분에서 의외로 모호한 인상을 받았어요.
그런 답답한 느낌을 어느 정도 다른 방향에서 해소 아닌 해소를 시켜준 게 애니 '바빌론'과 서적 '부분과 전체'였는데요.
애니 '바빌론'은 자살을 법으로 정하자는 얼토당토(?)하지 않는 이야기를 두고 전 세계가 난리가 나는 이야기인데요.
극중 주요등장인물이 주인공에게 엄청 집요하게 하나의 질문을 해요. 바로 당신이 생각하는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인데요.
등장인물
正崎善(세자키 젠) - 촉망받는 동경지검특수부검사인데요. 정의감과 성실함을 겸비란 완벽무결한 캐릭터인데 동료들의 줄 사망으로 정의감이 분노와 복수심으로 치달아요.
曲世愛(마가세 아이) - 단 한마디로도 최면을 걸 수 있는 능력자인데요.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해 인간의 근본 가치관을 뒤흔들어요. 그리고 세자키 젠의 주변 인물들을 죽이며 그가 추구하는 '정의'란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고문관이기도해요.
알렉스 W. 우드 - 생각하는 사람의 인간화라고 볼 수 있는 ㅎㅎ 미국의 대통령이에요. 각국에서 자살법으로 소동아닌 소동이 일어났을 때 이 문제을 대화로 해결할 묘안을 생각해내요.
斎開花 (이츠키 카이카) - 신역(新域, 신이키) 의 젊은 초대 의장이에요. 정치세력에 의해 만들어진 뉴페이스 인줄 알았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마가세와 뜻을 같이한 인물이에요.
文緒厚彦(후미오 아츠히코) - 젠의 후배.
瀬黒陽麻(세쿠로 히아사) - 젠의 후배. 등
사실 이 애니는 보다가 중간에 포기해서 중간에 텀이 좀 있었는데요. 주인공의 외로운 싸움과 내면의 고통 때문에 설명할 수 없는 환멸이 쭉 올라오더라구요. 아무리 상상이라도 이런 이야기는 내 취향이 아니구나 싶었는데요.
그럼에도 다시 보게된건 질문의 답이 궁금해서 였어요. 이야기 속에서도 이 답을 찾기 위해 세계 각국의 대표가 참석해 회의를 열고 미국의 대통령까지 등장해요.
모든 걸 걸고 자신의 '정의'를 지키려고 애쓴 세자키 젠이 결론낸 정의는 '옳은 일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이었는데 알렉스 (미국 대통령이죠..ㅎㅎ)는 세자키 젠의 '고민하는 정의'에서 한 걸음 더 명확히 나아가 '지속시키려는 작용 모든 것'이 '정의'이자 '선'이라고 결론지어요.
자살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를 따지는 문제에 있어서는 삶이 '정의'이자 '선'이고 죽음은 '비정의'이자 '악'인거죠.
어찌보면 '죽음'을 '이분법의 논리'에 적용시켜 그름의 자리에 넣고 그 반대 단어를 옳은 자리에 매칭시키며 되는 간단한 방법 같지만 세자키 젠의 고민이 있었기 때문에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무분별함의 덫은 피했다고는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 는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라는 아주 유명한 독일의 물리학자 분이 당대 활동한 물리학자들과의 회담이나 대화, 잡담(?)등을 남긴 물리학 수필 같은 책인데요.
사실 거의 이해를 못했지만 ㅎㅎ , 영화 '오펜하이머'를 통해 느낀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어요:)
[…종교는 가치의 세계를 다뤄. 종교는 사실 그 자체보다는 어떤 일이 이루어져야 하는가.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하지. 자연과학에서는 옳고 그름이 문제가 되는 거고, 종교에서는 선악, 즉 가치 있는 것과 무가치한 것이 문제가 되는 거지. 자연과학은 기술적으로 합목적적인 행동의 기반이고, 종교는 윤리의 기반이야]
바빌론이나 오펜하이머에서는 생각지 못한 '종교'가 나와서 아하!하고 속에서 끄덕끄덕했던 순간이었어요. 정의에 대해 가장 민감한건 '선'과 '악'을 탄생시킨 '종교'라는 해석이 신선했어요!
[...닐스가 카드 네 장을 냈을 때 상대편은 결국 포기했고 닐스는 판돈을 많이 땄다. ...닐스가 자랑삼아 같은 무늬의 다섯 번째 카드를 보란 듯이 내밀었을 때, 닐스는 그제야 자신이 사실은 같은 무늬의 카드를 다섯 장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님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트 10'과 '다이아몬드 10'을 혼동했던 것이다. 따라서 확신에 찬 그의 말은 사실은 '허풍'이었던 것이다. ...'인상들의 힘이 과연 수백 년간 인간들의 사고를 규정해왔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p247)
'인상'이라는 단어가 나왔는데요. 우리가 강하게 믿고 확신하는 '정의로운 선한 모든 것'이 사실은 '인상들의 힘'에 의해 규정 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에는 그럴수도 있겠구나 싶었는데요.
생명체는 다 DNA가 있고 그 DNA는 유전병 같은 것이나 인종 등등의 확실한 요소를 말해주기도 하겠지만 그 밖에도 많은 것들이 뒤섞인 결합체라고 생각하는데요. 애니 '바빌론'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와요. 우리가 믿고 확신하는 것들이 사실은 과거 어떤 조상들(?)의 착각이거나 궤변일수도 있다는 거죠.
[...내 개인적인 희망에서 비롯된 해석일지도 모르지만, 역사에서도 지속적인 영향력을 갖는 혁명은 기존의 것들을 최대한 유지하는 가운데 제한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할때 이루어지는 게 아닌가...](p275)
이 부분은 그저 숙연해지는 기분이었던 거 같아요. 눈앞의 내 집착이나 야욕이 아니라 우리 후손의 미래를 생각하고 평화를 유지하려는 노력은 정말 어느 시대나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들은 선을 위해 악과 대치하여 싸워야 한다고 확신할 거야. ...좋은 편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싸워. 하지만 나쁜 편을 위해서는 그러면 안돼'하는 약간의 문제의 소지가 있는 옛 규칙은 그런 무기에도 적용되는 걸까? 나쁜 편을 위해서는 절대로 만들면 안 되는 원자폭탄을 좋은 편을 위해서는 만들어도 되는 걸까? ...이런 견해가 옳다면, 어떤 일이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는 누가 결정하는 것일까? 여기서 히틀러와 나치가 악하다는 것은 쉽게 판단할 수 있어. 그러나 미국 측도 모든 맥락에서 볼 때 선할까? ...어떤 일이 선인지 악인지는 그들이 사용하는 수단으로 미루어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p334)
우리말에 '이기는 편 우리편'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일단 지는 편에 서고 싶지 않는다는 당연한 심리도 있겠지만 이기는 편의 주장이 결국 정의가 되는 일이 발생하니 그것으로 인해 생기는 이익을 쫒게 되는 건데요.
당시 미국이 경쟁심을 이기지 못해 원자폭탄을 투하하지만 않았어도 한국은 자주독립을 했을 수도 있는 긍정적 신호들이 분명 존재했었는데요.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는 조바심이 눈 앞을 가로 막았을 때 그것이 '선'인지 '악'인지, '인상'에 휘둘리고 있는 건 아닌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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